요즘 통영시청 앞을 지나다 보면 대형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이런저런 이유로 항의 집회를 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시청 앞 휴게쉼터는 언제부턴가 집단민원의 단골 항의 집회장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공무원과 민원인들은 확성기가 뿜어내는 고음과 굉음에 다시 2차 고충을 겪는 당사자가 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죽림 더 팰레스 주민들의 수차례 집회가 이어졌고, 19일에는 아침 8시경부터 죽림 일성유수안 2차 신축아파트 공사로 인해 인근 주민들이 소음과 분진, 매연 등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있다며 대형 음향장비와 북, 꽹과리 등을 동원해 굉음을 쏟아내며 공사 중지를 촉구하는 항의 집회가 열렸다.
그 집회를 지켜보던 중 확성기를 통해 쏟아내는 여러 주장 중에 "소음 때문에 못살겠다." 라며 다같이 박자를 맞춰 내지르는 구호가 기자의 귀를 강하게 자극했다.
정작 자신들도 '소음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며 그렇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어찌 자신들이 내지르는 확성기의 굉음과 꽹과리, 북소리에 피해를 입는 일반민원인과 인근 주민, 그리고 아침부터 업무에 쫓기는 공무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집회를 여는 각 주체마다 생활권과 행복추구권을 찾겠다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집회로 인한 소음으로 타인이 입는 피해는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러니란 말이 떠오른다.
전국적으로 건설사업과 헙오시설 및 지역 개발에 대한 주민과의 갈등으로 열리는 항의 집회는 '일단 반대의 목소리를 높혀 놓고 보자’라는 유형이 표준 모델이 된지가 오래다.
작은 사안임에도 이벤트적이고 자극적인 구호로 떠들석하게 주위의 시선과 언론의 호기심을 유도하려는 본질과 벗어나 포장된 집회가 전국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행복추구권을 찾겠다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일 수 있다. 그 권리를 찾겠다는 데는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 확성기를 이용해 시민의 불편과 사안과는 관련없는 공적인 업무에까지 지장을 초래하게 하고, 마치 예전의 데모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집회는 분명 주변의 동감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
또 언제부턴가 이런 항의 집회에는 어김없이 갓 돌을 지난 갓난 아이는 물론 서넷 살 꼬마까지 항의 문구를 새긴 머리띠와 어깨띠, 피켓을 들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부모들을 따라 외치고 손동작과 몸동작까지 따라 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날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을 해야 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저 아이들도 피해의 당사자다." 라는 답을 들었다. 국민의 권리인 복지와 행복 추구권은 나이를 따질 것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의 당사자고 조기 교육시대라지만 집회 현장을 가르치기에는 일러도 너무 일러 보인다.
또 집회에 참가한 한 엄마는 버젓이 아들에게 구호를 새긴 머리띠를 감기고 동작을 따라 하라고 시키면서도 취재기자를 향해 우리 아들 사진은 찍지 말라며 당부한다.
집회에 동원된 아이들은 이런 모습이 머릿속에 선한 일로 각인될 것이다. 교육의 본질은 세뇌라 했지 않은가. 이 아이들에게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구호를 외치고,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주장이 옳다 해도 방법에 무리가 있고, 행복추구권 이란 볼모를 앞세워 일단'시끄러우면 이슈가 된다'는 식으로 고성이 오가는 집회는 시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반대를 위한 반대로 하나의 이벤트 행사 같이 항의 자체를 즐기는 모습으로 비쳐지지는 않을까?
그를 증명하듯 얼마 전 장기간 항의 집회를 가졌던 더 팰래스 주민들은 물론, 이날 집회도 각 언론사에 팩스와 이메일을 통해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집회를 알리는 문서에는 집회의 이유나 피해의 요지를 설명한 내용은 전혀 없었고, 집회 자체만을 알려 달라는 듯 보도를 요청하는 문구 뿐이었다.
'대화와 타협은 차후 일이고 일단은 시끄럽게 떠들어 놔야 협의에서 우위를 점한다.' 또는 '우는 아이 젖준다 '는 식의 항의 집회가 사회 통념을 넘어 교묘한 언론 플레이와 자극적인 퍼포먼스까지 가미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일이든 동전 같은 양면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흐름에 의한 개발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 될 것이고, 공사기간 동안 분진과 소음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 면이 많을 것이다.
또 그 공사로 인해 내 집 마련의 꿈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생기는 주변 주민들의 인프라와 경제적인 이익도 있을 것이다.
물론, 관련 기업은 최소한의 인근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려 나서야 할 것이고, 대화의 창을 열어 놓고 민원창구 등을 개설해 주민들과 적극적인 대화의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한 발씩 물러서는 양보의 마음이 해결의 실마리라는 건 건설사 측도 피해를 주장하는 주민 측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선진국에서는 이 같은 분쟁에 대해 일종의 시민참관제도인 옵저버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옵저버 제도란 집회현장에서 조정자 내지는 평화유지자 역할을 수행하며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직접 분쟁의 사안들을 검토하여 합당성을 판단하며 중재하는 제도다.
이 같이 우리도 보다 민주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대형 확성기에서 내뱉는 소리가 시민들과 공사관계자들에게 더 강하게 더 잘 전달 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판단이다.
마스크를 쓴 묵언의 촛불시위는 말 한마디 없어도 전 국민을 움직였다. 명분이 확실하면 작은 묵언의 항쟁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통영시도 근본적인 시위발생의 원인해결을 위한 사회적 노력이 공론의 장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소될 수 있도록 적절한 중계 창구를 열어야 할 것이다.